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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08-05-23 09:33
    전법 행군 외길 24년 한 겨울 매화로 살다 -법보신문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8,322  
    전법 행군 외길 24년 한 겨울 매화로 살다
    정년 퇴임하는 영원한 군승 이종인 법사
    기사등록일 [2008년 03월 03일 월요일]
     

    “쾅!”
    쇠 찢어지는 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장병들과 함께 하자고  자청해서 합류한 팀스피리트 훈련 대열을 따라가던 길이었다.
    시도 때도 없는 이동과 상황변화에 몸은 이미 녹초상태가 된지 오래. 피로감에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다 등골을 훑고 지나가는 아찔한 자극에 눈을 뜨니 타고 있던 차는 앞 차량을 파고 들어 V자로 꺼져 가고 있었다.

    췌장파열 딛고 다시 군포교

    찰나의 순간이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내 몸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다시 정신을 잃었다. 이동병원과 사단 의무대, 춘천 국군병원을 거쳐 수도병원으로 긴급 호송됐고 4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아야 했다.
    결과는 췌장파열. 췌장은 손상되면 다시는 복구가 되지 않는다. 경과를 물어오는 선임자에게 의사는 “가망이 없다”며 매일 링겔병으로 하나씩 끊임없이 새나오는 췌장액이 멈춰야만 산다고, 기적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기적이 현실이 됐다. 췌장액이 거짓말처럼 멈춰버렸다.

    원오 이종인 법사에게 삶은 그렇게 다시 돌아왔다. 첫 임관지였던 27사단에 배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다시 얻은 삶의 기회는 이 생명을 전법을 위해 불태우라는 하늘의 경책이었을까. 그 후로 24년 동안 이 법사는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전법의 길을 걸어왔다. 마치 홀로 기나긴 행군을 떠나듯.

    “전생부터 스님이었을 거예요. 아마 그 전에는 군인의 삶도 살았었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생활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군법사라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 외롭고 힘든 직업입니다. 그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나라의 대들보가 될 청년들에게 전한다는 것이 너무 즐거웠어요. 열심히 살아온 만큼 후회는 없습니다.”

    군법사로서는 역대 3번째 육군 군종병과장인 그는 전역을 앞두고 지난 24년을 그렇게 압축시켰다. 몇 년 전까지 ‘군종감’이라고 불렸던 군종병과장은 군종장교 최고의 위치다. 4개 종교를 통틀어 단 1명만이 2년 임기의 군종병과장에 임명된다. 불교계는 1991년 5월 제22대 육군 군종병과장이자 군법사로서는 첫 번째 병과장이었던 김덕수 법사를 시작으로 모두 3명의 육군 군종병과장을 배출해왔다.

    그는 “3년만 해야지 했는데 계급에 홀려 살다보니 24년이나 하게 됐다”고 농을 던졌다.
    “유교집안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한문을 참 잘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번역한다는 광고를 보고 나도 한번 해보자고 편지를 보냈지요. 그런데 해인사에서는 내가 출가하고 싶어 한다고 오해를 했는지 답장에 반야심경을 써 보내면서 이거 보고 101번만 다시 생각해본 후에 오라는 거예요.”

    그런데 반야심경이라는 것이 아무리 봐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동네 훈장에게 보여줬더니 연방 헛기침만 하다 슬쩍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했다. 남들 다 피하는 어려운 일만 골라 즐기는 성격은 산사 일주문 앞으로 그를 끌고 갔다.

    출가 후에는 가야산 호랑이라는 성철 스님을 10개월간 시봉하게 됐다. 성철 스님은 그를 상좌로 삼고 ‘원오’라는 법명을 내려줬다. 아무나 상좌로 받아들이지 않는 성철 스님의 결정에 해인사 대중들은 술렁거렸다.
    그런데 성철 스님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의 상좌인 법전 스님 밑으로 이 법사를 보냈다. 자기 상좌를 다른 상좌 밑으로 보낸다니 이것은 또 무슨 처사인가.

    “스님의 깊은 뜻을 누가 알겠어요. 그냥 나는 성철 스님도 내 은사 스님이고 법전 스님도 은사 스님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는 은사 스님이 두 분이예요.”
    이후 역경 공부에 매진하던 이 법사는 강원 강사로 일해 달라는 해인사 측의 부탁을 거절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대중을 가르치는 강사를 맡기에는 스스로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피성 입대’라고 했다.

    “그때 그 결정이 내 인생을 바꿔 버린 셈이죠. 내 평생을 군에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육군 병장으로 전역하고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시 입대한 거예요.”
    1985년 4월 그는 군법사의 신분으로 다시 군에 돌아왔다. 그와 같이 입대한 동기생들은 총 64명. 법사 7명, 신부 7명, 목사 50명이었다.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았다. 첫 임관지는 육군 27사단. 그 뒤로 5군단, 진해 육군대학, 8군단, 5사단, 3사관학교, 3군사령부, 육군본부, 계룡대를 거쳤다. 당시 동기생들 중 지금은 법사 2명, 목사 1명만이 현역으로 남아 있다.

    3번째 군승 육군 병과장

    군종병과 내 각 종교 간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파워게임은 늘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다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겠느냐”며 의연한 표정이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매화가 어떻게 진한 향기를 품을 수 있을까. 시련이 있기에 향기는 더욱 진한 법이다.

    늦은 나이도 그에게는 늘 스릴을 즐겨야 하는 이유가 됐다. 장교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진급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 때문에 항상 1차에 진급이 되지 않으면 바로 전역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욕심 없이 사는 게 출가한 사람 마음이라지만 군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기대하게 되는 것이 계급이다. 오죽하면 진급 발표가 나는 날이면 국립묘지 묘비석마저 쓰러진다는 농담이 있을까. 아슬아슬한 전역과 진급의 갈림길에서 그는 늘 한 걸음씩 앞으로 발을 내디뎌 왔다.

    그렇지만 그의 늦은 나이는 수많은 기록들도 선물해 줬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치 있는 기록은 군종병과장으로 취임한 것이라고 이 법사는 말한다. 보통 군에서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전역할 사람에겐 보직을 맡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육군 참모총장은 2년 임기의 군종병과장 자리에 1년 후면 전역해야 하는 이종인 법사를 임명하는 사상 유례없는 결정을 내렸다.

    “비결이요? 글쎄…. 비결이랄 것이 있을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성실함 밖에 없어요. 지난 24년간 단 하루도 아침 상황회의에 빠진 적이 없으니까. 장교에게 상황회의 참석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예요. 그런데 많은 군종장교들이 상황회의 참석을 선택처럼 여기죠. 늘 재밌는 법회를 만들기 위해 법문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죠.”

    병과장으로써 주어진 시간은 비록 1년뿐이었지만 그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됐다. 지난 59년간 만들지 못했던 병과 마크와 병과깃발을 만들어 낸 것이다. 병과 마크는 각 종교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지금까지 도안만 수천 번 그려졌고, 많은 병과장들이 해결하려 했지만 실패했던 과제였다. 이 법사가 만든 군종병과 최초의 마크는 이제 곧 전국의 군부대에서 사용될 것이다.

    짧은 1년의 병과장 생활을 마치고 2월 26일 이 법사는 전역식을 가졌다. 막상 군문을 나서려니 자신이 아스팔트 위에 뒹구는 낙엽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더 이상 옮겨갈 부대도, 명령도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도 하지 않았고 집도, 절도 마련하지 못한 채 살아온 전법 인생. 24년 간 군종병이 지어주는 밥이나 식당밥 이외에는 제대로 된 집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내 살은 전부 ‘아지노모토(味の素, 미원의 원래 일본이름)’살~”이라며 호탕하게 웃는다.

    은사 스님 모시고 수행 발원

    “지난 24년 동안 내가 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적이 없어요. 중이 갈 곳이 절밖에 더 있겠습니까. 해인사로 돌아가야죠. 가서 24년간 모시지 못했던 은사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면서 살아야죠. 하지만 내 젊은 날을 다 바친 ‘수행과 포교’라는 과제는 놓지 않을 겁니다.”

    영화배우 전도연이 칸 영화제 수상 당시 다음날 아침이 돼서야 비로소 기쁨에 몸을 떨었다고 했던가. 아마 그도 군복을 먹색 진한 옷으로 갈아입고 산사의 사립문을 열면서 비로소 전역을 실감할 지 모른다.
    하지만 만면 가득히 웃음 지으며 “군에 와서 고기 맛을 알아버렸으니 큰 일”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그는 24년 전이나 지금이나 천진난만한 수행자다. 계룡대를 빠져 나오던 길, 위병소의 장병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깊은 애정이 담겼다.

    “안녕, 내 열정들아. 안녕, 온 몸을 적시던 땀방울들아. 안녕, ‘충성’ 그 가슴 떨린 외침소리야.”

    계룡대=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939호 [200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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